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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도솔산은 선운산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 선운사 연혁
-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스님이 선운사를 창건한 뒤 통일신라기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효정(孝正) 스님이 퇴락한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절을 크게 중창한 이는 행호극유(幸浩克乳) 스님이다.
1472년(성종 3) 선운산의 한 암자에 머물며 수도하고 있던 행호스님은, 구층 석탑만이 외롭게 남은 채 폐허화된 선운사를 보고 안타까이 여겨 중창을 발원하였다.
이듬해(1473년) 제자 종념(終念) 스님과 함께 상경하여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에게 중창의 뜻을 밝히고 도움을 청하자, 덕원군은 재물과 함께 직접 원문을 써주었다. 이에 나주 보을정도(寶乙丁島)에 가서 재목 1천여 그루를 구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기와 20여 가마를 구워, 1474년 가을에 2층의 장륙전과 관음전을 완공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선왕의 영혼을 추모하는 수륙재(水陸齋)를 크게 열었다. 1476년에는 천불대광명전을 조성하였고, 1481년에는 모든 건물의 단청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지장전(地藏殿)ㆍ동상실(東上室)ㆍ금당(金堂)ㆍ능인전(能仁殿)을 짓고 영산회(靈山會) 등 53불회탱(五十三佛會幀)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10여 년에 걸친 극유스님의 중창불사로 인해 선운사는 옛 모습을 되찾아,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도 왕실의 원찰(願刹)로서 법등(法燈)을 환히 밝히게 되었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1597년(선조 3)의 정유재란 때 어실(御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타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2년간 승려 수십 명이 근근이 선방과 요사를 마련하고, 수년 동안 힘을 모아 법당 3칸을 지었다. 이러한 사정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던 무장현감 송석조가, 선운사의 어실은 왕실의 재(齋)를 여는 곳이었으므로 나라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1613년(광해군 5) 봄 일관(一寬) 스님에게 중창을 의논하였다.
이에 일관스님은 원준(元俊) 스님과 힘을 합하여 수많은 집을 돌며 시주를 모으고, 어실을 구실삼아 도백(道伯)으로부터 고창 문수산의 재목을 얻어 보전 5칸을 세운 다음, 상하 누각과 동서 양실을 건립하였다. 곧이어 법당ㆍ천불전ㆍ지장전ㆍ능인전 등을 창건하여 1619년까지 6년에 걸쳐 사찰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로도 일관ㆍ원준스님 등의 뜻을 이어받은 스님들에 의해 중수와 중건이 계속되어 1620년에 정문ㆍ향운각과 1624년에 천왕문을 세우고 1634년 법당에 삼존상을 조성ㆍ봉안하였으며, 1658년에 시왕전(十王殿), 1659년에 해납료(海納寮)ㆍ삼선료(三仙寮), 1676년에 약사전, 1677년에 나한전, 1678년에 극락전, 1682년에 칠성료(七星寮)ㆍ청심료(淸心寮), 1691년에 대승전 등을 창건하였다.
이 무렵 절에서 수행하던 대중은 무려 260여 명에 달하여 당시 사찰의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어 1693년에 동운암(東雲庵)을 창건하고 1699년에 미륵전, 1705년에 관음전ㆍ양계료(養鷄寮)ㆍ양봉료(養鳳寮), 1706년에 팔상전, 1709년에 한산전, 1713년에 장육전 등을 창건하였다.

도로안내
- 1)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 → 22번 국도(선운사 방향) → 삼인리 삼거리(좌회전) → 선운사 주차장
- 2) 호남고속도로 정읍I.C → 22번 국도와 29번 국도 → 갈림길(주천삼거리) → 22번 국도 → 흥덕 → 22번, 23번 갈림길 → 22번 국도 → 오산저수지 → 반암리 갈림길 → 우측도로로 2.8km → 왼편으로 선운산도립공원 진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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